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누스 피우스 (문단 편집) === 내정 집중의 속사정과 그 한계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는 평온했고, 완벽해보였지만 알고 보면 또 그렇지 않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두 차례 대규모 대외전쟁, 하드리아누스의 대외 순방, 그리고 선대 황제들의 대규모 공공건축물 건립과 대대적인 개보수 사업들은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 취약성 노출을 인지한 로마 엘리트 층에게 당면한 문제로 다가왔다. 따라서 이 황제가 한 일이 없어보여도 후대 로마인들이나 1940년대 이후 현대 로마사 연구에서도 좋은 황제 내지 내정에 최선을 다한 황제라고 평가받고 있다. 먼저 그가 즉위할 당시, 하드리아누스 시대 아래에서 내재된 불만이 표출되며 로마 제국의 국제 프린키파투스는 자칫 황제와 원로원 간의 기싸움을 넘어 양측의 정쟁이 심화될 분위기였다. 내전의 승리자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호칭을 부여하는 것도, 부자 상속이나 형제 상속에서도 늘 이를 통과시켜주는 이들이 여전히 원로원이었던 로마 원수정체 안에서 이는 단순한 갈등이 아닌 내전 혹은 정쟁에 따른 갈등 심화 이상의 문제였다. 당장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이우스]] 시대간, [[네로]] 몰락 후 [[갈바]] ~ [[베스파시아누스]]까지의 네 황제의 해만 보더라도 어떤 느낌인지 짐작이 갈 문제였다. 다행인건 안토니누스가 즉위 전부터 인망 높고 정적이 거의 없던 신사인데다, 즉위 후에도 변함없는 황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후임이었던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달리 노련했고 경험이 풍부했기에 평이 나쁘다 못해 증오의 대상까지 된 전임자로 단단히 화난 원로원을 쉽게 달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꼬아버린 제위 계승과 황실 결혼계획 문제로 자칫 제위계승자 간의 궁중암투 문제, 본인 집안 문제까지 일시에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무척 깔끔하게 해결했고 잡음도 나지 않아 평가가 좋았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 다시 확립한 원로원과의 공존 관계는 외손자 [[콤모두스]]가 192년 암살되기 전까지 벌어질, 로마 황실 특유의 고질적 궁중암투의 위험성을 사전에 없앴다[* 그렇다고 해도 [[루킬라]]의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가 발생해, 궁중암투 자체가 192년 전까지 마냥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까지 안토니누스가 완전히 막았다는 평은 이전처럼 황제 자리를 놓고 파벌끼리 원로원에 다리를 놓고 연대해 황제를 정치적으로 집요하게 공격하거나, 근위대 일부를 포섭해 황제를 제거하려는 암살 음모 방지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보다 그가 더 높게 평가받고 있고, 오늘날에도 현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그의 국고 관리와 국고 재정 건전화 노력이다. 로마 제국은 간접세가 보편적이지 않고 세금 구조가 오늘날처럼 복잡하지 않았지만, 국가 재정이 잘 살고 부유한 지방들(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일대, 그리스와 레반트, 이집트)에서 거둬들인 속주세 의존 문제 등의 고질적 약점이 뚜렷했다. 그런데 이런 단점 외에도 동서간 경제 편차는 하드리아누스 시대를 거치면서, 이전까지와 달리 원로원 안에서 속된 말로 한 가닥 하는 부자 원로원 의원들까지 지중해 동부 출신과 아프리카 속주 출신들이 자리를 채우며 권력 판도까지 서방 속주 나아가 이탈리아까지 밀리는 상황이 시작됐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들과 공존한다고 해도 이탈리아와 서방 경제 상황 악화는 로마시민권자들이 많은 이 일대가 생산성 악화, 민생 불안에 따른 치안 문제 등 악영향이 상당해진다는 이야기도 됐다. 설상가상 하드리아누스의 대외순방은 그가 즉위한 무렵, 잘사는 그리스계 도시들과 동방의 부유한 여러 지방들의 지방 재정까지 황제 체류 문제 등으로 이미 많은 돈을 쓴지라 마냥 이쪽 돈을 끌어쓰면서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에 퍼주기만도 어려웠다. 이는 세베루스 집권 직전의 상황을 전한 갈레노스의 설명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잘사는 속주보다 경제가 정체를 넘어 쇠락기에 접어든 이탈리아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는 도시 경제의 한계, 농촌 내 빈부격차 심화 현실에서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안토니누스가 취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 바로, 본국 이탈리아 각 분야 사업에 대한 넉넉한 자금 지원과 본국 내 사회복지였다. 간단히 말하면, 황제가 이탈리아 각 분야에 계획적으로 돈을 풀어, 각 지방마다 인프라 건설과 이를 통한 도시 경제 활성화에 노력한 것이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시대의 이런 노력 아래,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성장해놓은 경제 규모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안토니누스의 방법은 임시방편이었고 후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외침, 자연재해, 전염병 등 모든 문제가 폭발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언 발에 오줌누기였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다행이라면, 평온했던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친 시대에 때마침 로마 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등장해 급한 불은 껐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노력한다고 해도, 황제의 건강은 즉위 전부터 오랜 격무로 인해 좋지 않았고 제국의 문제는 황제 혼자의 노력으론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임은 첫 2년간은 나름 일을 했다가, 이후 완전히 망가져 나라를 내팽겨친 콤모두스였으니....]. 이 외에도 안토니누스는 국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꾸준히 황제가 평온한 듯 하면서도 불안했던 하드리아누스 개혁의 여러 문제를 원상복귀시키거나 이를 개선했다. 그는 즉위 직후 하드리아누스의 여러 조치 중 황제가 편하게 일하기 위해 바꾼 치안판사 제도와 로마관료 내 군대 미경력자 채용 완화 조치를 원상복귀시켰고, 마구잡이로 면세혜택이 내려진 특칙도 개선했다. 또 적극적으로 법을 고치고 민생을 관리해 속주 내 불만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그는 2세기부터 두드러진 현상, 즉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 귀족들과 다른 군문제에 문외한 귀족다운 한계도 노출했고 이는 향후 로마의 대외관계 및 속주 내 잠재된 불안요소를 가중시켰다. 그는 본국과 속주 민생 및 경제 문제에 매달린 나머지(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인지 몰라도), 두 전임자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이후 속주 군단의 탈이탈리아화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어 있던 문제를 수동적으로 방치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군단병들의 처우 개선을 수용해줬지만, 도미티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같은 병사와 그 가족들이 진짜 원하는 처우는 개선해주지 않은 채 탈영병 대우 개선, 로마군에게 포로가 된 게르만족과 그 가족 처우 개선 같은 징계 문제, 포로 처우 개선 및 그들의 정착 조치 등에 더 신경쓰는 모습까지 보여 비난받고 있다. 이는 상술된 게르만족 문제와 로마군 질적 문제보다 그가 현대 로마사 학자들에게 더 크게 비난받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안토니누스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래에서 연이어 취해진 속주 개편 및 통치 과정에서 심화된, 출신지와는 별개로 오랜 복무 기간으로 주둔지와의 이해관계가 깊어진 로마군, 로마군 사령관의 주둔지 권력장악 문제 역시 손보지 못했다. 따라서 설령 하드리아누스가 키워놓은 문제라고 해도 이 부분에서의 노력 역시 지나칠 정도로 소홀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는 즉위 전까지 군복무 경험이 없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방치됐는데, 뒤늦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노력한다고 해도 수십년간 미뤄진 이 문제들은 한 명의 황제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이런 안토니누스의 실책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미봉책에 그치게 된 위험성을 내포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